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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씨족(氏族)의 연원(淵源)

 

시조(始祖) 이상(李尙)은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파산군(巴山君)에 봉(封)해졌다. 임술보(壬戌譜): 1802년 순조2年(純祖)를 보면 그의 선계(先系) 등(等)에 관(關)한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고 범례편(凡例便)에 파산군(巴山君)이 처음으로 *1)봉작(封爵) 되었으므로 그를 시조(始祖)로 한다는 내용(內容)만 적혀 있다.

 

따라서 일반적(一般的)으로 알려진 대로 함안(파산)(咸安(巴山)이씨의 상계(上系)가 원조(遠祖) 위위시(衛尉寺) 주부동정(主簿同正) 이원서(李元敍)로부터 시작(始作)되어, 이탕취(李湯就), 이광주(李光柱), 이용기(李龍起)로 이어져 파산군(巴山君) 이상(李尙)으로 내려왔다는 세계(世系)는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2)상고(詳考)할 수 없으므로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에 대공(大功)을 세워 파산군(巴山君)으로 수봉(受封)된 이상(李尙)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파산(巴山)은 옛 함안(咸安)의 군명(郡名)이며 또한 산명(山名)으로 지금의 봉화산(烽火山)이며 주봉(主峯)은 파봉(巴峯)이다. 높이는 647m이고 파산봉수(巴山峯燧)가 있었던 함안군(咸安郡)의 영산(靈山)이나 후손(後孫)들이 군명(郡名)인 함안(파산)(咸安(巴山)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註>

*1)봉작(封爵): 제후(諸侯)에게 영지(領地)를 주고 관작을 내리던 일.

*2)상고(詳考): 상세(詳細)히 참고(參考)하거나 검토(檢討) 함.

 

 

 2. 본관지(本貫地) 연혁(沿革)

 

함안(咸安)은 원래(元來) 아시량국(阿尸良國) 또는 아라가야(阿羅伽倻)이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이 이곳을 빼았아 군(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때에 처음으로 군명(郡名)을 함안(咸安)으로 하였다가, 고려(高麗) 995年(성종14年(成宗)에는 함주(咸州): 별호(別號): 금라(金羅)

로 개칭(改稱)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1018年(현종9年(顯宗)에 다시 함안현(咸安縣)으로 복개(復改) 금주목(金州牧); 김해(金海)에 소속시키고 1172年(명종2年(明宗) 감무(監務)을 두었다.

 

1373년(공민왕22年(恭愍王) 고을 사람 주영찬(周英贊): 3世 이방실(李芳實)의 사위)의 딸이 명(明)나라에 들어가 황제(皇帝)의 귀인(貴人)이 되어서 총애(寵愛)를 받게 되자 주영찬(周英贊)이 *1)지군사(知郡事)가 되어 함안현(咸安縣)을 함안군(咸安郡)으로 승격(昇格)시킨 뒤 그대로 유지되어 오다가 몇 차레 변혁(變革)을 거처 오늘에 이르렀다.

 

중요(重要) 성씨(姓氏)로는 이(李), 조(趙), 안(安), 채(蔡), 윤(尹), 주(周), 유(劉), 정(鄭), 최(崔), 김(金), 강(姜)등이 있다.

 

<註>

*1)지군사(知郡事): 고려시대에 지방의 행정구역인 군(郡)의 으뜸 벼슬, 1018년(현종9年(顯宗)에 두었음(五品)

 

 

 3. 파명록(派名錄)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종파(宗派)는 시조(始祖) 상(尙)의 큰아들인 2세(二世) 청(淸)의 계열(系列)을 시랑공파(侍郞公派), 작은 아들인 2세(二世) 원(源)의 계열(系列)을 충의공파(忠義公派)라 하여 내려왔다.

 

1) 시랑공파(侍郞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는 2세(二世) 청(淸)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歷任)하여, 3세(三世) 문하시중(門下侍中) 홍(弘), 4세(四世) 검교호군(檢校護軍) 자수(滋秀), 5세(五世) 무진부사(茂珍府使) 운길(云吉), 6세(六世) 대구현령(大邱縣令) 즐(隲), 7세(七世) 원로(元老), 8세(八世) 대사성(大司成) 미(美)까지, 독신(獨身)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8世 미(美) 창강공(滄江公)할아버지가 네 아들을 두셨다.

   첫째 인형(仁亨) 호(號) 매헌공(梅軒公)

   둘째 의형(義亨) 호(號) 행헌공(杏軒公)

   셋째 예형(禮亨) 호(號) 오헌공(梧軒公)

   넷째 지형(知亨) 호(號) 국헌공(菊軒公) 이시다.

 

시랑공파(侍郞公派)는 9世에 내려와서 네 문중(門中)이 되고, 네 문중(門中)에서 다음과 같이 분파(分派)되어 내려간다.

 

  가. 매헌공파(梅軒公派)

        충순공파(忠順公派), 금위공파(禁衛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성재공파(惺齋公派)

  나. 행헌공파(杏軒公派)

        신천공파(新川公派), 예천공파(醴泉公派), 송암공파(松菴公派), 황파공파(篁坡公派)

        운포공파(雲圃公派), 인의공파(引義公派), 계공랑공파(啓功郞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월암공파(月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다. 오헌공파(梧軒公派)

  라. 국헌공파(菊軒公派)

 

2) 충의공파(忠義公派)

충의공파(忠義公派)는 상(尙)의 둘째아들인 2세(二世) 원(源)이 판도사판서(判圖事判書)를 역임(歷任)하시고, *1)시호(諡號)가 충의공(忠義公)이므로, 후손(後孫)들은 충의공파(忠義公派)라한다. 3世 고려상장군(高麗上將軍) 원수(元帥) 충렬공(忠烈公) 방실(芳實)의 아들 4世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예(芮)가 세 아들을 두고 세 문중(門中)으로 이어진다.

 

   첫째 영(潁) 호(號) 정재공(靜齋公)

   둘째 희(稀) 호(號) 은재공(隱齋公)

   셋째 집(禾咠 ) 호(號) 한재공(閒齋公)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내려간다.

  가. 정재공파(靜齋公派)

        흡곡공파(歙谷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수사공파(水使公派), 부윤공파(府尹公派)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경력공파(經歷公派), 부여공파(扶餘公派)

  나. 은재공파(隱齋公派)

     이천공파(伊川公派), 돈재공파(遯齋公派)

  다. 한재공파(閒齋公派)

     부위부장공파(副尉部將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註>

*1)시호(諡號): 제왕(帝王), 경상(卿相),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功德)을 칭송(稱頌)하여 추증(追贈)하는 칭호(稱號)

 

 

 4. 씨족사(氏族史)의 개요(槪要)

 

함안(파산)(咸安(巴山) 이씨(李氏)의 원조(遠祖)는 고려초엽(高麗初葉) 위위시(衛慰寺)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지내시고 함안현(咸安縣) 광려산(匡廬)山) 두봉하(兜峯下)의 내동리(內洞里)에 사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원서(李元敍)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수 없는 탓으로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에 대공(大功)을 세워 파산군(巴山君)으로 수봉(受封)된 광록대부(光祿大夫) 이상(李尙)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있고 있다.

 

관향(貫鄕) 함안(파산)(咸安(巴山)은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이다. 2세(世)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청(淸)과 판도사판서(判圖事判書) 원(源) 형제(兄弟)는 시조(始祖) 이상(李尙)의 아들이고, 손자(孫子)인 3세(世) 문하시중(門下侍中) 홍(弘)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원수(元帥) 방실(芳實) 두 종형제(從兄弟)분이 함안이씨(咸安李氏)의 *1)현달(顯達)의 문(門)을 열었다.

 

고려(高麗) 구국(救國)의 명장(名將) 3世 방실(芳實)은 함안이씨(咸安李氏)가 낳은 거목(巨木)이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卽位)한 1350년대(年代)에 세기(世紀)에 걸친 원(元)나라의 내정간섭(內政干涉)과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등의 잦은 침입(侵入)으로 고려(高麗)의 국력(國力)은 쇠퇴 일로에 있었다. 원(元)의 속박을 배제하고 홍건적을 격퇴해 고려(高麗)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 공민왕(恭愍王)의 뜻이었다.

 

3世 방실(芳實)은 이 *2)웅지(雄志)를 받들어 일생(一生)을 홍건적(紅巾賊) 격퇴(擊退)의 전쟁(戰爭)에서 살다가 억울하게 죽었다. 1359年(공민왕8年(恭愍王)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침입(侵入)해온 4만(四萬)의 홍건적(紅巾賊)을 격퇴(擊退)하여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고, 1360年(공민왕9 (恭愍王)에 다시 홍건적(紅巾賊)이 서해도(西海道): 황해도(黃海道))에 침입(侵入)하자, 풍천(豊川)에서 이를 물리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공민왕(恭愍王)이 친(親)히 차고 있던 옥대(玉帶): 옥티)와 옥영(玉纓): 옥갓끈)을 하사(下賜)받았다.

 

1361年(공민왕10年(恭愍王)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상원수(上元帥) 안우(安祐), 서북면(西北面):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 도병마사(都兵馬使) 김득배(金得培)등과 함께 20만(萬) 홍건적(紅巾賊)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해 개경(開京): 서울))이 함락(陷落)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 안동(安東))로 피신(避身)하는 치욕적인 패배였다.

 

그러나 다음해인 1362年(공민왕11年(恭愍王)에 서북면(西北面)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개경(開京) 탈환(奪還) 작전(作戰)을 감행(敢行)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 도원수(都元帥) 안우(安祐), 원수(元帥) 김득배(金得培), 등(等)과 함께 20만(萬) 홍건대적(紅巾大賊)을 대파(大破)하여 압록강(鴨綠江) 밖으로 몰아 내었다.

 

그러나 개선(凱旋)길에 방실(芳實)의 공(功)을 시기(猜忌)한 친원파(親元派)로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일어킨 간신(奸臣) 김용(金鏞)의 간계(奸計)로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등(等) 공(功)을 세운 장군(將軍)들과 함께 피살(被殺) 되었다. 3세(世) 방실(芳實)은 고려(高麗) 475년간(年間)의 역사(歷史)속의 인물(人物)로 추앙(推仰)받아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아미리(峨嵋里) 임진강안(臨津江岸) 잠두봉(蠶頭峰) 숭의전(崇義殿): 사적(史蹟)223號))에 모셔진 고려(高麗) 16공신(功臣)의 한 분이시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세조(世祖)때에 8世 대사성(大司成) 창강(滄江) 미(美)는 함안(파산)이씨(咸安(巴山)李氏)를 명문(名門)의 위치(位置)에 올려놓은 인물(人物)이다.

 

일찍이 시서(詩書)를 하여 생원시(生員試)에 2등(等)으로 입격(入格)하였는데 시제(試題)로 주역(周易) 본의(本義)의 "사출이율(師出以律)" 이 출제(出題)되어 그의 답안지(答案紙)를 *3)사림(士林)들이 서로 돌려가며 암송(暗誦)하였고, 1453年(단종1年(端宗) 문과(文科): 증광시 정과(增廣試丁科))에 *4)대책불기초(對策不起草)하고 급제(及第)하였고, 진해현감(鎭海縣監)에 부임(赴任)하여치현(治懸)을 하여 정청송간(政淸訟簡)하게 하니 현인(懸人)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칭송(稱頌)하였다.

 

그리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等) 여러 관직(官職)을 거처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나 *5)차제(此際)*6)장광지제(莊光之際)라 관직(官職)을 버리고 고향(故鄕) 진주군(晋州郡) 동면(東面) 가좌촌리(加佐村里) 진동(津洞): 경남(慶南) 진주시(晋州市) 진성면(晋城面) 가진리(嘉津里) 진동(津洞))옆인 월아산(月牙山) 하(下)에서 은둔(隱遁)하다가 진동(津洞) 밭두덕에 서재(書齋) 용두정(龍頭亭)을 지어 액자(額子)에 "육영일문 현재배출(育英一門 賢材輩出)" 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 9世 인형(仁兄) 대사헌(大司憲): 세조14年(世祖)) 춘장시(春場試) 갑과(甲科) 장원(壯元)), 의형(義兄) 남원부사(南原府使): 성종8年(成宗)) 춘장시(春場試) 병과(丙科)), 예형(禮亨) 목사(牧使): 성종11年(成宗))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성종17年(成宗), 중시(重試) 병과(丙科) 양과(兩科)), 지형(智亨) 대사간(大司諫): 성종8年(成宗)) 춘장시(春場試) 병과(丙科)), 4형제(兄弟)가 수학(修學)하여 5부자(父子)가 6급제(及第)를 하자, 성종(成宗)이 그들의 출생(出生)마을 진주군(晋州郡) 동면(東面) 가좌촌리(加佐村里) 진동(津洞)을 "가좌촌 (佳佐村)" 이라 사촌명(賜村名)까지 하여 5부자(父子) 6급제(及第)의 집안으로 명성(名聲)을 떨쳤다.

 

특(特)히 맏아들인 인형(仁亨)은 1468年(세조14年(世祖)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급제(及第)한 수재(秀才)로 문장(文章)에도 빼어났다. 당대(當代)의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과는 사돈간(査頓間)이었으나, 연산군(燕山君) 즉위후(卽位後)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회오리에 휘말려 *7)부관참시(剖棺斬屍) 되는 비운(非運)을 겪었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8)충간(忠諫)하고 죄(罪)없이 죽어가는 젊은 유생(儒生)들을 구(救)하기 위(爲)하여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다가 도리어 화(禍)를 당(當)한 것이다. 연산군(燕山君)때에 있었던 무오(戊午), 갑자(甲子)의 2대(二大) 사화(士禍)로 함안이씨(咸安李氏)는 된서리를 맞았고, 이때 9世 예형(禮亨), 지형(智亨) 등(等) 인형(仁亨)의 두 동생(同生)도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경남(慶南) 고성(固城), 진주(晋州), 함안(咸安), 거제(巨濟)로 낙향(落鄕)했다. 고성(固城), 진주(晋州), 함안(咸安), 거제(巨濟), 합천(陜川), 의령(宜寧), 하동(河東), 산청(山淸), 등지(等地)에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집성촌(集姓村)들이 있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들의 후손(後孫)들은 대부분 관직(官職)과 인연(因緣)을 끊고 *9)문한(文翰)의 가통(家統)을 이으며 조용히 살았다.

 

<註>

*1)현달(賢達): 벼슬과 명망(名望)이 높아져 세상(世上)에 드러남.

*2)웅지(雄志): 웅장(雄壯)한 뜻, 큰 뜻.

*3)사림(士林): 유림(儒林)

*4)대책불기초(對策不起草): 시험답안지(試驗答案紙)를 초안(草案)을 잡지 않고 곧바로 작성(作成).

*5)차제(此際): 이즈음.

*6)장광지제(莊光之際): 단종(端宗)이 양위(讓位)하고 세조(世潮)가 찬위(簒位) 한때.

*7)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큰 죄(罪)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極刑)을 추시(追施)하던 일.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屍體)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음.

*8)충간(忠諫): 충성으로 간함.

*9)문한(文翰): 문필(文筆)에 관한 일.